안녕하세요. 풀무질입니다!
2020년은 회원님에게 어떤 한 해였나요? 저희 풀무질에게는 정말 고난의 한 해였어요. 마스크를 쓰고 매장을 둘러보시는 손님께 음료 한 잔 건네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가득이었습니다.
12월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 새로 시작한 ‘온라인’ 금언독서회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작년에는 매장에서 진행했던 금언독서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니 지금 시국이 얼마나 심각한지 피부로 와닿았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셔서 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어요. 랜선을 타고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서로서로 책읽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에 책도 더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풀무질 금언독서회는 매주 일요일에 진행하니 줌으로 참여하고 싶으신 분은 홈페이지 통해서 신청해주세요! 물론, 인스타 라이브로도 진행됩니다.
또 좋은 소식이 있었어요. 바로 풀무질 건물 2층에 저희와 동물권 읽기모임을 함께하는 ‘동물해방물결’이 이사 왔답니다! 물리적으로도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앞으로 저희와 더 많은 일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듯해요. 이번에 비거니즘 잡지 <물결>이 창간되었으니 많이많이 구독해주세요!
소식지 말미에 실린 두 글은 저희 두 대표님의 글입니다. 한겨레 신문에서 연재중인 전범선 대표의 칼럼 <전범선의 풀무질>, ‘멸종반란한국’에서 기후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홍성환 대표의 칼럼 <홍성환의 멸종반란>입니다. 한 번씩 읽어보시고 포근한 연말연시 보내시길 바랍니다.
추운 2020년을 보내고 2021은 더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열심히 풀무질하겠습니다.
2020년 12월 명륜동 지하 1층에서 불꽃의 작은 온기를 담아, 풀무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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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겨울학기 풀무질에서는 추운 겨울에도 사상의 불을 지피기 위해 겨울학기를 운영합니다. 모든 강의와 행사 정보는 풀무질 누리집과 SNS에 상세히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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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첫 번째 금요일: 동물해방물결과 함께하는 동물권 읽기모임 매달 세 번째 금요일: 페미니즘 읽기모임 매달 네 번째 금요일: 미학 읽기모임 매주 일요일: [무료] 온라인 금언독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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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해방물결과 함께 2020년 12월에 동물해방물결이 풀무질 2층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2021년 소의 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함께합니다. |
비거니즘 잡지 <물결> 창간호
지금, 동물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 비건 세상을 기다려온 당신을 위한 잡지, 계간 <물결>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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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의 풀무질] 물고기가 아니라 물살이다
해방운동의 주요 과제는 지배 구조의 착취적인 언어를 바꾸는 일이다. 노동해방운동은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외치고 여성해방운동은 ‘집사람’이 아니라 ‘배우자’라고 외친다. 장애해방운동은 ‘절름발이’, ‘벙어리’ 등을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장애를 비하한다고 지적한다. 오랫동안 널리 쓰이던 말을 그만 쓰자고 하면 불편하다. 그 말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달가울 리 없다. 그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전에도 없는 낯선 말을 쓰면 소통이 어렵다.
백기완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다. 평생 민족해방운동에 몸담으신 분이다. 외래어나 한자어 대신 최대한 순우리말을 쓰셨다. 그분의 말글은 내게 어색하다 못해 억지스러웠다. 노나메기(나눠 먹다), 벗나래(세상), 니나(민중), 비주(창조) 등 괄호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혼자서 이러시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런데 ‘동아리’, ‘새내기’, ‘달동네’도 당신이 꾸준히 써서 퍼진 거라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물해방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바꿀 말이 많다. 예를 들어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거양득’이다. 돌을 하나 던져서 새가 두 명이나 죽으면 그게 이득인가 손해인가? 방금 비인간 동물을 ‘마리’가 아닌 ‘명’으로 수식했다. 왜 ‘이름 명’을 사람 셀 때만 쓰는가? 사전상 ‘마리’는 “짐승, 물고기,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다. 이름 있는 동물도 많은데 사람만 ‘명’이라 하는 건 종차별이다. 지금 워드 프로세서에 ‘종차별’을 썼더니 아래에 빨간 줄이 생겼다. 앞으로 인종차별, 성차별처럼 사전에 등재될 것이다.
육식주의적 언어는 인간의 인지 부조화를 지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은 끔찍하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둘을 언어적으로 구분한다. 살아 있는 동물은 소, 돼지, 닭, 개이지만 죽은 동물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가 된다. “오늘은 내가 송아지 한 명 죽여서 줄게!”라고 말하면 소름 돋으니까 “오늘은 내가 소고기 쏠게!”라고 한다.
인간이 먹기 위해 굳이 이름을 에둘러 부르는 것은 동물이 유일하다. 버섯은 산에 있거나 식탁 위에 있거나 버섯이다. 바나나가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갑자기 ‘바나나 고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 돼지, 닭, 개는 죽는 순간 고기로 전락한다. 그래야 인간이 맘 편히, 살아 있는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으면서, 사체를 씹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대체 무슨 말인가? 엄연히 살아 있는 존재를 ‘물고기’라 부르고, 죽으면 ‘생선’이라 한다. 해괴망측하다. 어류에 있어서는 한국어의 육식주의적 대상화가 특히 심하다. 그들의 삶을 오직 인간이 먹기 위한 것으로 정의한다. ‘물고기’란 비윤리적인 것을 떠나서 지적으로 게으른 표현이다. 육상동물을 다 ‘땅고기’라고 부를 게 아닌 이상 ‘어류’나 ‘수생동물’이 맞다. 후자를 순우리말로 하면 ‘물살이’다. 나는 이 말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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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환의 멸종반란] 어느 섬의 이야기
이것은
태평양 어느 외딴 섬의 이야기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만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던 섬은 처음에 이름이 없었다.
햇빛이
창창하고 하늘은 더 없이 푸르던 어느 날 아침, 나무로 만든 카누를 타고 한 부족의 왕이 섬에 도착했다. 왕은 바다 건너 다른 외딴 섬에서 항해를 시작했는데,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부하들과 함께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왕은 그 섬을 신의 선물이라 여기고 카누를 정박하기 전 섬을 한바퀴 돌며 신께 기도했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카누를 정박한 뒤 이곳 섬을 커다란 땅, ‘라파누이’ 라 이름 지었다.
평화로웠던 라파누이 섬의
삶은 왕의 죽음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족은 왕을 신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석상을 만들었다. 석상은 왕의 모습이기도 했고, 땅에 축복을 내리고, 태양과 비를 통해 자연을 가꾸고, 바다를 통해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자비롭고 정의로운 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왕의 여섯 아들들이 영토를 나누어 계승하며 원래 하나이었던 땅은 이제 인간의 상상 속에서 여섯 조각이 되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섯으로 나뉜 부족은 각기 더 많은 영토를 원했다. 원래 모두의 것이던 모래사장은 이제 한 부족이 가진 사유지가 되었다. 더 많은 야자수를 위해, 더 많은 돌과 자연을 가지기 위해 나뉜 부족은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더 크고 많은 석상을 가진 부족이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었고, 석상을 앞다투어 만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석상을 위한 화산암을 운송하기 위해 야자수를 닥치는 대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나무를 바퀴로 이용해 산 위로, 바닷가로, 섬 곳곳으로 운반하여 석상을 세웠다. 여섯 부족이 다섯, 넷, 셋, 둘로 합쳐지는 과정에서도 석상은 계속 세워졌다.
시간이
지나자 섬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왕이 처음 카누에서 보았던 초록으로 반짝거리던 섬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벌거숭이 섬은 더 이상 과일도, 건축을 위한 목재도, 불을 위한 땔감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섬에는 기근이 찾아왔다. 그렇게 부족의 운명은 불모지가 되어 더 이상 삶이 불가능해진 섬에서 끝을 맞이했다.
섬은
또다시 외로워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을 홀로 보내고 난 후 또 다른 방문객이 섬을 찾았다. 그들은 이 섬에 ‘이스터’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스터 섬을 방문한 고고학자들은 나무가 없는 섬에서 석상을 위한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조사를 통해 이전에는 나무가 무성했음을 알게 된 학자들은 거대 석상을 세우기 위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나무를 전부 베어버린 이전 문명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석상을 세우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나무를 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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